같은 반에 페루인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애가 좀 모자르다. 그냥 무지한거면 이해를 하겠지만 태도도 불량하고 종종 문란하다 여겨질 때도 있을 정도로 행실이 좋지 못하다. 차마 구체적인 묘사까지는 하고 싶지도 않아 넘긴다. 사실 뭐 어떤 짓을 한들 나한테만 잘 하면 그만이거든. 그치만 결정적으로 이 친구는 나를 싫어한다. 다행인 것은 나도 이 친구를 싫어한다. 그래서 조별 과제를 하게 될 때 이 친구랑 짝이 되면 그냥 손을 놓고 있기 일수다. 처음에는 나도 몇번 좀 같이 해 보겠다고 애를 써 봤는데 도무지 말을 들어먹기를 하나 적극적이기를 하나, 모르면 배우기라도 해야 하는데 배우고자 하는 의지 또한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공교롭게 짝이 되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치만 결국 내가 의욕이 없는건 내 잘못이다. 괜히 남의 탓 하고 싶어서 미워하는거지, 요즘 헤이 해 지고 멍청해진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다. 아, 현실을 인정하는건 참으로 아픈 일이로구만. 뼈빠지게 고생하는 엄마 아빠 생각도 해 보고 내가 돈벌면서 힘들었던것을 되세김질 해 봐도 나는 범인인지라 그냥 편하고만 싶다. 지칠 만큼 공부한 것도 아니고 주위에 인간 관계가 복잡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마음이 계속 무거운 걸까.
뭔가 내가 계속 잘못을 하고 있나보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불편하게 만든다거나 하고 있나보다. 못난 주제에 잘난척이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나보다. 내 존재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걸까. 남 뒷담화나 하고 앉아있고 조금 못났다고 약점 잡아서 그걸로 반찬삼아 신나게 이야기나 하고 아이고, 이렇게 보니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다. 내가 제일 못났다.
어릴 때 나는 발달이 늘 느렸다. 그래서 유치원도 다른 애들 보다 일년 늦게 들어갔는데도 7살이나 되어서야 적응을 했다. 그 전에는 선생님이 화장실만 가도 울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사회성은 물론이거니와 학습발달이 늦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적에 많이 아팠어서 그 것 때문에 그런 걸로 생각을 했다. 소아비만에 발달장애까지 정말 대책이 없는 아이였던 것 같다. 만약 내 아이가 그랬다면은 나는 그 애에게 정도 못 주고 포기해버렸을 것 같지만 우리 엄마는 참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 부터 엄마랑 동생이 제일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와는 사실 어릴적에는 별 다른 교감을 하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도 그 때는 젊었기 때문에 덜 떨어지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부모님 두분 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셔서 틈만 나면 어디든 나갔다. 집에 자가용이 없던 시절에도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나랑 동생 손을 붙잡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계절에 상관없이 산이든 계곡이든 바다든 질리도록 여행을 다녔다. 지금에와서 생각하지만 그 여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거나 하지 않았다고 그리 생각한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교감이 있었기에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집단 따돌림도 당해보고 선생님들에게 이유없는 구타도 많이 당해왔지만 철이 들 무렵 부터 그런 것들을 서서히 극복하고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종종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불안해지고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질때마다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나는 벌써 한국 나이로 스물 여섯살이나 먹었고 내가 속한 사회는 어른들의 사회인데 내 걸음걸이는 여전히 느려서 청소년기 그 어딘가 쯤에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뒤늦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다. 내 또래 애들은 저 멀리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초등학교 6년 내내 한 발자국도 내딯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뛰었다. 엄마한테 처음으로 학원이라는 곳에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종로 m 스쿨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학원이었는데 등록하러 갔더니 레벨 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레벨테스트를 마치자 학원에서는 나를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성적이 너무 낮아서 그 어느 레벨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기가 차했지만 그 보다도 내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했다. 그렇게 그 학원에서 퇴짜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이곳 저곳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작은 학원이 있다는 것을 안 엄마는 나보고 그 곳이라도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만약 싫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물론 가겠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도 역시나 레벨테스트는 쳐야만 했다. 매우 낮은 점수가 나왔는지 열등반에 배정되기는 했지만 내쳐지지 않음에 감사했다. 그 날부터 달렸다. 그 곳 선생님들은 정말 지금 생각 해 보면 굉장한 직업적 소명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기초도 채 다져져 있지 않은 나를 따로 학원 수업 시작 전부터 불러서 개념을 이해시키고 학원 수업이 끝난 후 이해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굳이 페이를 더 받는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분들은 나에게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그분들 덕분에 학습 발달은 어떻게든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는 학원은 어디에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애들의 괴롭힘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일부러 여학교로 진학을 했다. 여자애들 끼리만 있으면 외모에 대한 패널티는 조금 덜 하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은 수월했다. 그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학원에 가서 열두시 넘어서 집에 오는 고단한 생활 보다도 그놈의 인간관계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은 내가 어디 있던간에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죽을 때 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생각한게 홀로 있음에 익숙해지기이다.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저지르기. 호스트 가족들과 그다지 맞지 않음에도 계속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이다. 눈보라가 치던 비바람이 불던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내 스스로 집에까지 올 수 있다는 것 만큼 나에게 크나큰 이점은 없다. 가끔 나는 내 상황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뚱뚱하고 못생기고 냄새나고 더럽고 멍청하고 그런데도 지금 내 주변은 전부 어른이라 마지못해 참아주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나와 짝꿍이 하기 싫었던 아이들의 마음이나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으아... 스탑 씽킹... 사람이 미치는 게 한순간이라는 것이 확 느껴지는 일기... 내 자신과 한 다짐을 왜 자꾸 까먹냐.. 내일 당장 내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비참해져도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지. 엄마는 내가 뚱뚱하고 못생기고 냄새나도 더럽고 멍청해도 나를 계속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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