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1장부터 12장의 주요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함께 그의 고난에 관한 것이다. 요한 복음의 처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여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보충하며 하나님과 말씀을 구분함과 동시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서술되어있다.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로 말씀이 곧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말씀(로고스), 그리고 예수님은 구분됨과 동시에 동일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부터는 예수님의 기적의 행하심과 박해가 나온다. 널리 알려져 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병자를 치료하고 장님의 눈을 띄워 주며 안식일에 일을 행한다는 이유로 박해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또한 태초 이후 쉼 없이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도 일한다 말씀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뭔가 대단한 장소에서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범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포도주가 넘쳐나는 부잣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겠는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을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은 어린아이는 집이 넉넉하여 그 것을 선뜻 내놓았겠는가? 기적이란 실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희생과 사랑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빛은 태양빛이 사물을 보게 하듯 사람 안에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랑을 보이게 했다. 남의 집 경사를 위해 물을 선뜻 포도주와 교환해 준 사람들, 아이가 들고 있는 광주리 속에 들어있는 빵과 물고기를 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주섬주섬 내어 놓은 사람들, 쉬는 날에도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들이 기적이다.
예수님은 계속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나 되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한다. 일제시대와 그 이후 군사독재 때, 민중과 열사들을 탄압한 자들은 일제나 군부임에 틀림 없으나 실질적으로 탄압을 행한 것은 그러한 악을 선으로 믿는 또 다른 민중이며 자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이며 열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에도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불태운 자들 또한 이상주의 사회국가 건설의 미명 아래에 있었던 모택동과 홍위병들이었다. 예수님의 박해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갖고 있다 한들 폭력과 힘 또한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악에 가깝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역사 속에서 선이 힘 또한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선함은 힘이나 폭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힘을 가진 소수의 악들이 힘 없는 다수의 선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젠가 올 선의 승리이며 선을 승리하게 할 것이다.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에서 마치 슬로건처럼 내세우는 말 같지 않은 말이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다. 단순하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실로 의로운 사람이라면 저 말만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0-38”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는 믿지 않더라도 그 일만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다. 희생과 사랑의 일들이다. 그것이 참됨을 알면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지위를 잃기가 두려워 죄책감을 느끼면서 까지 하나님을 박해한다. 사람은 진리를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특히나 돈과 명예가 있을수록 갖고 있는 것을 잃기 싫은 마음과 더욱 더 갖고 싶은 욕심에 신념을 따르는 것이 어렵다. 일제 치하나 군부 때도 대다수의 갖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악임을 알면서도 따르고 민중과 선을 억압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말 보다 실로 어려운 일이다.
현세의 생명과 죽음 후 영생에 대해 12장에서 이렇게 나온다. 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유 또한 희생을 위해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진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자들은 매우 드물며 그러한 자들은 사후에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하고 열사들이 그러하며 순직자들이 그러하다.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선을 따르는 자들은 목숨의 그렇지 않은 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고문과 살육에 맞서 선하게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선으로서 선을 행하다 죽은 자는 죽지 않음과 다름없다. 선은 그가 죽은 후에도 다른 자로 하여금 계속 이어지며 칭송되고 기억될 것이다.
말로서 기도하고 말로서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곧 진리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진리는 싸움을 만들 수도 없고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상처주거나 억누르는 것 보다 아이러니 한 일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셨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치라 하시며 예수께서는 여자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왜 사람들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일까?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녀는 어겼으므로 그녀는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간음이란 실로 행위를 한 것 이외에 음욕을 품은 것 만으로도 간음이 되며 또 다른 큰 죄 중 하나인 살인도 살인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타인을 미워하는 것 까지도 살인이 된다 성경은 그리 가르치고 있다. 그리 따진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 되나 이 간음한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는 뉘우치고 회개 또한 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며 앞으로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며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현재 예수님을 알고 있다 믿고 있다 자신 있게 떠들고 다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생면부지인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하거나 이도교들과 무신론자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이 아닌가? 이 들 또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례를 받았다고, 매주 교회를 다닌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원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란 실로 좁은 문이다. 실로 왕중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는 언제나 낮은 곳에서 대단치 않은 사람들, 곧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리도 자신을 낮추고 계신데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다는 자들이 어찌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기독교의 회개하라는 말에 이렇게도 무게가 있는지 몰랐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죄를 알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누구도 타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고 모든 욕구를 버리며 살아갈 수 없다. 그저 계속 주님 앞에 육신이 죽는 날 까지 뉘우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힘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육신의 목숨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 보다 진실로 참된 가치, 참 빛, 하나님을 으뜸으로 두고 섬기는 것이 인간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며 기독교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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