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라미크로X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2013. 5. 4. 17:40 Project/History

요한복음의 1장부터 12장의 주요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함께 그의 고난에 관한 것이다. 요한 복음의 처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여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보충하며 하나님과 말씀을 구분함과 동시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서술되어있다.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로 말씀이 곧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말씀(로고스), 그리고 예수님은 구분됨과 동시에 동일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부터는 예수님의 기적의 행하심과 박해가 나온다. 널리 알려져 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병자를 치료하고 장님의 눈을 띄워 주며 안식일에 일을 행한다는 이유로 박해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또한 태초 이후 쉼 없이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도 일한다 말씀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뭔가 대단한 장소에서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범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포도주가 넘쳐나는 부잣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겠는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을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은 어린아이는 집이 넉넉하여 그 것을 선뜻 내놓았겠는가? 기적이란 실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희생과 사랑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빛은 태양빛이 사물을 보게 하듯 사람 안에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랑을 보이게 했다. 남의 집 경사를 위해 물을 선뜻 포도주와 교환해 준 사람들, 아이가 들고 있는 광주리 속에 들어있는 빵과 물고기를 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주섬주섬 내어 놓은 사람들, 쉬는 날에도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들이 기적이다.

예수님은 계속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나 되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한다. 일제시대와 그 이후 군사독재 때, 민중과 열사들을 탄압한 자들은 일제나 군부임에 틀림 없으나 실질적으로 탄압을 행한 것은 그러한 악을 선으로 믿는 또 다른 민중이며 자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이며 열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에도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불태운 자들 또한 이상주의 사회국가 건설의 미명 아래에 있었던 모택동과 홍위병들이었다. 예수님의 박해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갖고 있다 한들 폭력과 힘 또한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악에 가깝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역사 속에서 선이 힘 또한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선함은 힘이나 폭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힘을 가진 소수의 악들이 힘 없는 다수의 선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젠가 올 선의 승리이며 선을 승리하게 할 것이다.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에서 마치 슬로건처럼 내세우는 말 같지 않은 말이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다. 단순하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실로 의로운 사람이라면 저 말만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0-38”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는 믿지 않더라도 그 일만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다. 희생과 사랑의 일들이다. 그것이 참됨을 알면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지위를 잃기가 두려워 죄책감을 느끼면서 까지 하나님을 박해한다. 사람은 진리를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특히나 돈과 명예가 있을수록 갖고 있는 것을 잃기 싫은 마음과 더욱 더 갖고 싶은 욕심에 신념을 따르는 것이 어렵다. 일제 치하나 군부 때도 대다수의 갖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악임을 알면서도 따르고 민중과 선을 억압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말 보다 실로 어려운 일이다.

현세의 생명과 죽음 후 영생에 대해 12장에서 이렇게 나온다. 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유 또한 희생을 위해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진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자들은 매우 드물며 그러한 자들은 사후에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하고 열사들이 그러하며 순직자들이 그러하다.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선을 따르는 자들은 목숨의 그렇지 않은 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고문과 살육에 맞서 선하게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선으로서 선을 행하다 죽은 자는 죽지 않음과 다름없다. 선은 그가 죽은 후에도 다른 자로 하여금 계속 이어지며 칭송되고 기억될 것이다.

 말로서 기도하고 말로서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곧 진리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진리는 싸움을 만들 수도 없고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상처주거나 억누르는 것 보다 아이러니 한 일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셨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치라 하시며 예수께서는 여자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왜 사람들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일까?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녀는 어겼으므로 그녀는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간음이란 실로 행위를 한 것 이외에 음욕을 품은 것 만으로도 간음이 되며 또 다른 큰 죄 중 하나인 살인도 살인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타인을 미워하는 것 까지도 살인이 된다 성경은 그리 가르치고 있다. 그리 따진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 되나 이 간음한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는 뉘우치고 회개 또한 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며 앞으로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며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현재 예수님을 알고 있다 믿고 있다 자신 있게 떠들고 다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생면부지인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하거나 이도교들과 무신론자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이 아닌가? 이 들 또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례를 받았다고, 매주 교회를 다닌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원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란 실로 좁은 문이다. 실로 왕중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는 언제나 낮은 곳에서 대단치 않은 사람들, 곧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리도 자신을 낮추고 계신데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다는 자들이 어찌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기독교의 회개하라는 말에 이렇게도 무게가 있는지 몰랐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죄를 알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누구도 타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고 모든 욕구를 버리며 살아갈 수 없다. 그저 계속 주님 앞에 육신이 죽는 날 까지 뉘우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힘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육신의 목숨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 보다 진실로 참된 가치, 참 빛, 하나님을 으뜸으로 두고 섬기는 것이 인간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며 기독교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4. 17. 09:53 Project/History

  플라톤은 그가 말하는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커다란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 곳에서 그들의 발과 목에 사슬을 묶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가정하였다. 그들은 머리를 돌릴 수 조차 없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전방에 존재하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으로부터 돌연히 솟아오른 높은 지대가 있다. 이 높은 지대에는 물건들을 나르면서 앞뒤로 걷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르는 물건들은 나무와 돌과 그 밖의 다양한 물질들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간의 상(像)들이었다. 이 걷고 있는 사람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단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을 뿐, 서로를 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 뒤에 있는 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있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이며, 그 그림자는 사람들이 불 앞으로 걸을 때 비친 반영이었다. 그들은 대상물이나 그것을 나르는 사람을 결코 볼 수 없으며, 그 그림자들이 다른 사물들의 그림자인지 어떤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한 그림자를 보며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벽에 반사된 메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밖에 다른 것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수들은 벽에 만들어진 그림자들만을 인식하게 될 뿐이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이 죄수들 중 한 사람이 그의 족쇄를 풀고 일어나 주위를 돌아 불빛을 향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처음에 그의 모든 운동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벽을 통해 그림자를 보는데 익숙했던 그 움직이는 대상들을 직접 보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혹시 이 움직이는 대상물들이 그림자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는 그 대상이 그의 눈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그가 불 자체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보게 된다면, 그의 눈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 때 틀림없이 그는 그를 풀어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그가 아무런 모순 없이 경험할 수 있었던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 그림자들이 그가 불빛 속에서 보았던 실존하는 대상물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 죄수가 되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동굴 입구로 통하는 가파르고 험준한 통로를 통해 강제적으로 끌려와 태양빛을 접하게 된 후를 생각해보자. 태양 광선은 눈에 매우 고통스러운 충격을 주게 되고, 그는 그가 방금 실재적이라고 믿었던 어떠한 사물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이 동굴 외부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 그는 몇몇 그림자들을 인지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친밀감을 가질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면, 그는 이전에 그것이 동굴의 벽에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양을 보게 될 것이며, 수면에 비친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들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지식에 있어 중요한 전환, 또는 진보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때 순전히 어둡고 흐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이제 좀더 세밀한 선과 색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상한 체험을 통해 그 풀려난 죄수는 점차적으로 사물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계절들과 사물의 온갖 변화를 이끄는 것이 태양이며, 그 밖의 많은 사물이 그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동굴의 벽에서 보았던 것, 즉 그림자 반영들과 가시계(可視界)에 실재하는 사물들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태양 없이는 가시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죄수는 동굴 속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될 것인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지혜(知慧)라고 믿었던 것을, 즉 지나가는 그림자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을 칭송하며, 그림자들이 진행되는 질서를 가장 훌륭하게 기억함으로써 다음에 올 그림자를 가장 잘 추측했던 사람에게 상을 주어 모두에게 존경하도록 하였던 행동 방식을 회상하면서, 동굴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였던 인물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환경에서 벽면에 반영된 그림자들을 분별하는 데 다른 죄수들과 경쟁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대상들에 관해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그 설명을 죄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죄수들은 그 상황을 매우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비웃을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의 시력은 완벽했으나, 이제 그는 시력을 상한 채 돌아왔다고,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각주:1]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세 가지의 비유를 들었다.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그리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데아란 절대적인 것,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눈이 아닌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정사각형을 떠올렸을 때, 우리는 개념적으로 완벽한 정사각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로 정사각형을 그리는 경우 어떤 완벽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개념에 가까운 정사각형은 그릴 수 있지만 완벽한 정사각형은 그릴 수 없다. 우리 생각 속에 있던 정사각형은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에 비유할 수 있다. 

플라톤의 세가지 비유 중 태양의 비유는 이데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행동들을 뜻한다. 진실, 사랑, 평화, 정의, 믿음과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개념들을 일깨워 주는 행위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 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물체를 볼 때에도 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를 태양의 비유라고 한다.

선분의 비유는 보이지 않는 것이 순수한 이데아에 가깝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돈과 사랑이 있을 때, 돈은 가시적이므로 가짜에 가깝고 사랑은 보이지 않으므로 순수한 이데아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번 포스팅의 주제와 함께 첨부한 동영상의 내용이 바로 동굴의 비유이다. 

처음 동굴 밖으로 끌려 나온 죄수는 태양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결국 이상은 동굴 밖에 나간 채로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는 것이며 단지 이상에 가까워지고 본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비유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부분은 실제 인간사회에 적용을 시켰을 때 어디가 동굴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만큼 동굴의 비유를 적용시키면 교육의 역할은 동굴 밖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교육이 그림자 놀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데아론 적으로 따진다면 이 비유 자체도 완벽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사실 여러모로 알고 있었던 것들과 알아 갈 것들에 대해 회의와 의문이 던져지는 이론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가 더 진리에 가깝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은 그림자를 보고 있지 않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반문들이 진리를 맛 본 죄수가 동굴 속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동굴 속 그림자놀이밖에 모르는 다른 죄수들에게 동굴 밖의 이야기를 했을 때 일어나는 혼란인 것일까? 이 비유는 얼마든지 사용하는 사람 좋을 대로 사용되어 질 수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 해야 할 것이다.



  1. 플라톤의 인식론http://sang1475.com.ne.kr/philo/platon2.htm [본문으로]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장~12장을 읽고 한 생각들  (0) 2013.05.04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29. 23:07 Project/History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아무 형태도 없던 지구에 빛이 생겨 빛과 어둠이 나뉘고 밤낮이 생겼다. 물과 물이 나뉘어 하늘이 생기고 하늘 아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서 땅과 바다가 생겼다. 땅에는 식물들이 자라게 되었다. 해와 달을 만들어 낮과 밤을 그리고 계절들이 생겼다. 밤 하늘에는 별들도 만드셨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하늘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땅 위에 짐승들도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다른 생물들을 지배하게 하셨다. 그리 만든 사람은 선악과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며 다른 것은 다 취하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도록 하셨다.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었으며 그는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짝을 만들기 위해 그의 갈빗대를 취하야 여자를 만드셨다. 어느 날 교활한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라 유혹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함께 나누어 먹으니 수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여자에게는 산고의 고통을 남자에게는 농사의 수고로움을 지게 하셨다. 땅으로 내려온 그들은 아들을 낳았는데 형의 이름은 카인으로 농사를 짓는 자였고, 동생의 이름은 아벨로 양을 치는 자였다. 첫 번째 추수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재물은 받으셨으나 카인의 재물은 받지 않아 질투심의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아벨의 피로 카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며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는 표를 받았다. 그 후로 카인은 대를 이어 갔는데 카인의 자손 중에 야발은 천막에 살면서 가축을 기르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동생 유발은 최초의 음악가였으며 두발-카인이라는 자는 철과 구리로 각종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아담의 아내도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때 아담의 나이는 130살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셋이라 지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 하였다. 인류가 번성하고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의 죄악 또한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지상에 창조한 것들을 홍수로서 쓸어버리시겠다 하시었으나 아담의 자손 중 하나인 노아는 의인이라 여호와의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잣나무로 배를 만들어 그 곳에 노아의 식구들과 모든 생물 한 쌍씩 넣어 살아남도록 하였다. 비는 40일 동안 내려 150일동안 물이 땅을 뒤엎었다. 땅이 마르고 여호와께서는 노아가 바치는 제물을 받으시며 다시는 사람을 물로서 멸하지 않겠다 하시며 그 증표로 무지개를 삼으셨다. 노아의 아들은 셈, 함 그리고 야벳이 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인데 노아가 함이 자신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가나안을 저주하여 가장 천한 종이 되라 하였다. 이들 아들들의 후손은 대대로 이어져 나가며 홍수 후 여러 나라와 민족으로 나누어졌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 중에는 아브람이 있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여 하란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촉복하시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였으며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이 들어 그는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다. 아브람의 식구들이 이집트로 가면서 아브람은 이집트인들이 사래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것을 염려해 오누이로 위장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아브람의 예상대로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지만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다. 하여 바로는 다시 사래를 아브람에게 돌려준 후 아브람의 식솔들을 나라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바벨탑(창세기 11장 1절~9절)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바빌로니아에 있는 한 평야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탑을 높이 쌓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말이 통하지 않게 하셨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살짝 맥락 밖에 있는 듯 하여 뒤로 빼 놓았지만, 원래는 아브람 이야기의 앞에 위치하고 있다. 구술성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전에는 왜 이렇게 같은 말이 반복되고 무엇보다 굳이 한 집안의 가계 전체를 읊는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글이 없었던 시대에는 기록이 불가능하므로 축약 해 버리거나 생략 해 버리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구전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굳이 전부 읊어야 했으며 이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지금의 성경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계를 읊는 것은 그 만큼 자손들이 번창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중간에 두발-카인이라는 자가 철과 구리로 기구를 만들었다는 부분과 바벨탑에서의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대신 역청을 썼다는 부분에서 문명의 발전이 어느 정도 까지 이루어졌는지 대략적인 추측도 가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해가 힘들었다. 카인의 재물은 왜 받지 아니하셨는가? 그 것 보다 더 의아한 내용은 홍수 이후 구절을 보면 살인을 하는 자는 죽이라 되어 있는 데 카인은 동생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카인을 죽이는 자는 7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다. 카인의 자손 중 라멕이란 자 또한 한 젊은이를 죽였는데 라멕을 죽인 자는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악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하나님 께서는 홍수라는 징벌로서 다스리시고 홍수 이후에 살인을 하지 말라는 규범을 만드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창세기를 보면 사람들의 수명이 상당히 길다. 거의 900년 가까이 되니 실제 수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법 하다. 생식 또한 100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자손을 낳았다고 하는데 나이를 세는 법이 현재와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진짜 옛 사람들의 수명이 실제로도 길었던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성경 인물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 원인이 자외선 등의 유해물질을 차단하던 궁창 위의 물이 홍수 때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말씀하신 바대로 된 것이다. (홍수 이전 인간의 악행을 보시고) 너희들 안에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니, 그것의 연한은 120년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인물들의 수명을 기재해보면, 노아의 홍수 이전 보통 800년 이상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후, 절반이하로 급격하게 줄고, 또한 서서히 더 줄다가, 모세가 120살에 죽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른다.”[각주:1]

결론적으로 성경은 구전에서 글로 옮겨진 것이며 상당히 오래된 문헌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본문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시대상과 구전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위키피디아[창세기] http://ko.wikipedia.org/wiki/%EC%B0%BD%EC%84%B8%EA%B8%B0 [본문으로]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장~12장을 읽고 한 생각들  (0) 2013.05.04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29. 07:16 Project/History

신이 지금의 인간들처럼 노역을 감당했을 시절, 그 때의 일은 매우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일곱 명의 큰 신들인 아눈나키 신들은 이기기 신들에게 노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들의 고문관은 영웅 엔릴이었고, 그들의 임명관(throne-bearer)은 닌우르타였으며, 그들의 보안관은 엔누기였다. 그들은 강한 힘을 가진 각각의 신이었으며 신들은 많은 것들을 던져 우주를 나누었다. 아누는 하늘로 올라가고 대기의 신 엘릴은 엔키를 만들어 지혜를 부여했다. 

이이기 신들은 티르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팠다. 40년 이상, 그들은 밤낮없이 일을 했고 그들은 불평했다. 그리고 그들은 엔릴에게 가서 그들의 노역을 없애달라고 하기로 했다. 그들은 반역을 꾀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한밤중 엔릴의 사당의 문에 다다라 그의 집 주위를 둘러싸고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엔릴은 자느라 알지 못했다. 

칼칼은 누스쿠를 깨우고 누스쿠는 그의 주인인 엔릴을 깨웠다. 엔릴은 그의 종을 그의 집으로 모이게 했다. 그는 누스쿠에게 문을 잠그게 하고 무장을 시켰으며 자신의 앞에 세웠다. 그러나 누스쿠는 그의 주인에게 어찌 당신의 자식들을 두려워하느냐 물었다. 엔릴은 자신의 아버지인 아누를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였으며 엔키 또한 불렀다.

아누는 엔릴에게 이기기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왜 그들이 엔릴을 끌어내려 하는지 물었다. 이기기신들의 연유를 들은 엘릴을 울면서 아누에게 그를(이이기 신들을 말하는 듯..) 지옥으로 떨어뜨려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누는 이이기신들의 노역이 실로 고됨을 인정하면서 어찌하여 그들을 책망하지 말라 한다.

그는 탄생의 여신 닌투에게 신들의 노역을 대신 지을 인간을 태어나게 했다. 그들은 여신을 부르고 신들의 산파인 지혜로운 마미여신에게 인간들이 엔릴의 일과 신들의 노역을 지게 하도록 부탁했다. 닌투는 이것들이 자신이 일이 아니니 모든 것을 정화할 자와 함께 해야 하며 그자가 자신에게 점토를 주면 만들겠다고 했다.

엔키는 큰 신들에게 새로운 달 일곱 번 째 날, 그리고 만월에 정화 의식을 할 터이니 신 하나를 잡아서 그의 피와 살을 점토에 섞으라고 하였다. 신들은 지혜를 가진 신인 웨일라를 죽여서 그의 피와 살을 취했다. 신의 살로부터 영혼이 생겨날지니 이것이 바로 생명의 징표라 하였다. 닌투는 점토를 섞은 뒤 아눈나키 신들과 이기기 신들을 다 불러 점토 위에 침을 뱉게 하였다. 신들은 자신들을 노역으로부터 해방시킨 마미 신의 발등에 키스했다. 그리고 마미를 모든 신들의 여주(Mistress)라 칭했다. 그녀는 주문을 복창했다. 에아라는 신이 그녀를 도왔다. 주문을 마친 그녀는 점토를 열 네 등분 해서 오른쪽에 일곱 개 왼쪽에 일곱 개를 놓고 그 사이에 벽돌을 놓았다. 이들이 각각 남자와 여자가 되었다. 닌투는 달수를 세었고 열달이 지나고 마지막 날에 산도를 열었다.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출산을 도왔고 그녀의 허리를 졸라맸다. 모든 것이 완성되고 신들은 기뻐했다. 그들은 9일 동안 기뻐하였다. 그러나 1200년이 지나고 엔릴은 인류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그들을 멸망시킨다.[각주:1]

아트라하시스는 점토판에 기록된 최초의 홍수설화이며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라고 한다. 서사시는 소설의 원시적 형태이니만큼 운문임에도 나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이유인지는 링크 되어 있는 아트라하시스 영문 번역에는 중간중간에 주어가 모호하여 읽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신의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는 신화 위키의 한국어 페이지를 참조했다. 한글로 번역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디테일 한 부분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게 많았다. 영어로 된 본문 또한 대괄호 부분이 추측된 부분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트라하시스는 홍수설화이지만 링크된 이야기는 인류의 창조까지만 나와 있다. 여러 가지 상징적인 내용들 가운데 10달을 세어 마지막 날에 산도가 열리게 하였다는 부분은 인간의 임신과 출산이 신화로서 표현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트라하시스의 신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인간적인 면모가 더 강한 것 같다. 애초에 신이 노역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신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이기기신들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을 파야 하는 노역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만 있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이 노역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 것일까? 이 서사시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수력 사회이며 수력 사회는 관개농업을 위한 대규모 설비 시설이나 더 넓게는 다양한 목적의 대 공사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 대규모의 공사들은 주민 전체에 의해 시행되고 관료층의 감독을 받게 된다.[각주:2] 따라서 서사시에서의 신들의 노동은 이기기 신들을 대신 할 인간들의 노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 신들의 노역을 지게 된 인간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지상은 시끄러워졌다. 이는 실제 인간들의 노동에 대한, 그리고 관리자들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는 지역 특성상 강의 범람이나 바닷물의 역류를 관리 해 주지 않으면 농사도 어려울 뿐 더러 실로 홍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아트라하시스의 홍수 설화는 그 때 당시 인간의 관점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신화로서 풀어냄과 동시에 정치적인 성향도 띄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세계의 홍수설화는 비단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만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다. 가만히 보면 대략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인간들이 창조되고, 인간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죄를 짓는 인간들이 많아지고, 그 때문에 절대자, 신이 노하여 홍수를 내린다. 그 수 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인류를 존속시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역시 이러한 맥락의 홍수 신화가 존재한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홍수는 인간의 자업자득이므로 인간은 반성하고 후에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교육을 하여 신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징벌하는 신과 윤리에 매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남은 소수의 선택된 선한 인간이 신의 뜻에 합당한 문명을 창조하며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면에서 홍수설화는 인류의 거의 모든 제반 문제를 포괄하는 중요한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각주:3]


  1. ATRAHASIS translated by Tikva Frymer-Kensky http://www.class.uh.edu/mcl/classics/Atrahasis.html [본문으로]
  2. Story factory[메소포타미아 문명]http://fictionfactorystory.tistory.com/entry/%EB%A9%94%EC%86%8C%ED%8F%AC%ED%83%80%EB%AF%B8%EC%95%84-%EB%AC%B8%EB%AA%85 [본문으로]
  3.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홍수(洪水)설화]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hong-su.htm [본문으로]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계절과 신화(神話, mythology)  (0) 2013.03.08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20. 14:11 Project/History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그리고 역사란 또 무엇일까


히스토리아(Historia, 역사의 우의(寓意, allegory). 니콜라오스 기시스작 (1892년)[각주:1]

역사는 여러 세대에서 그 세대를 기준으로 한 과거에 대해 각각의 세대에 따라 다른 관점으로 쓰여진다. 인류가 어떻게 인류서 살아왔는지에 대해 설명되어 있어야 하며 현재의 인류가 갖고 있는 문제를 인류 스스로 발견하고 어떻게 인류가 어떻게 이 특정한 시간, 우리의 특정한 시간의 흐름에서 세기를 넘어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시간적인 흐름뿐 만이 아닌 더 넓은 시점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중요한 것들을 가려 낼 수 있고,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관련성을 찾아 내는 일련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문명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다 평등하다. 우리가 특정한 역사적 과거의 주요부분을 통해 전체적인 문명의 발전과 역사를 관찰하는 것은 우리 또한 역사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단지 기록되었거나 기억된 사실의 묶음이 아닌 논의된 일련의 것들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해석의 논의는 사건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일들 중 어떤 것들을 사건이라고 하는지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보편화 되는 지가 가치의 핵심이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가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역사에는 사실과 의견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 또한 이러한 면에서 유의해야 하며 우리는 현재의 환경과 역사 속 특정한 사건의 배경이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가 주는 즐거움을 우리는 빼놓지 않아야 할 것 이다.[각주:2]

개인적으로 역사를 배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사를 통해 영감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역사의 가치' 항목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역사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역사는 전 세계라는 커다란 공간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어떠한 개연성을 갖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픽션이든 논 픽션이든 어떠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으면 스토리 텔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역사를 배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미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역사는 어찌되었든 한번 이상 가공이 된 기록이며 기록의 목적은 결국 읽히기 위함이기에 흥미를 끄는 요소가 다분히 숨겨져 있다. 어떤 역사가도 전혀 의미없는 일들을 역사랍시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예를들면 옆집사는 뫄뫄네 개가 새끼를 낳았네라던가 하는 그런 어찌 되도 좋을 만한 것들의 기록이 아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사건'들을 세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역사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이렇게 크게 두개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역시 과거를 통한 배움이다. 나 또한 어째서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하는 명제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가장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있고 한번 일어난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시 일어나지 않을 과거로부터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전혀 다른 장소와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임에도 말이다. 그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역사가 단지 일어났던 사건들의 나열이 아님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역사는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록하는 세대에 따라서 달리 논의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현재 또한 반영되어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현재의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97%AD%EC%82%AC [본문으로]
  2. A History of Civilization, Robin W. Winks [본문으로]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계절과 신화(神話, mythology)  (0) 2013.03.08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15. 14:38 Project/History

언어가 말의 형태로 소통될 때 지니는 성질을 구술성이라 한다.[각주:1] 구술성은 대부분의 인구에서 문자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의 사고와 언어의 표현이다. 구술성의 연구는 구두사회, 즉 문자가 없던 사회의 경제, 정치, 제도의 모든 인류 발전적 측면과 관련해 폭넓게 연결되어 있다[각주:2].

최근의 연구는 구술 사회 중 하나인 캄보디아의 마을 타케오와 문자사회를 비교해 구술이 복잡하고 끈끈한 사회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쉬르는 가장 긴요한 것은 구술로 하는 말이며, 말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음소론, 즉 언어가 음에 깃드는 방식을 연구했으며, 헨리 스위트는 단어가 문자로 짜인 것이 아닌, 기능을 맡은 음단위인 음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다.[각주:3] 

윌터옹(Walter. J. Ong)

윌터옹(Walter. J. Ong)은 구술성을 1차적 구술성과 2차적 구술성으로 나누었다. 1차적 구술성이란 쓰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구술성을 가리키며 2차적 구술성은 쓰기를 아는 사람들의 구술성을 가리킨다.[각주:4] 월터 옹은 문화의 단계를 전달매체에 따라 [구술·청각적 단계 → 문자의 단계 → 전파의 단계]로 변천해 왔다고 말하며 문자언어는 구술·청각언어가 변질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구술 청각언어와 문자언어를 대조하면서 구술·청각언어는 문자언어에 비해 더 현실성이 있고 진정한 언어이며, 내면성을 향한 특별한 감각적 열쇠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을 상호 결합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어느 언어보다 인간의 사고와 강한 친밀성을 지닌다고 강조하였다.[각주:5]

따라서 문자란 구술 언어의 한계로 인해 발명된 것으로 정보 전달과 역사의 기록, 보존이 용이하지만 전달자의 감정이나 내면을 구술 언어만큼 정확하게 전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음독이든 묵독이든 간에 그 텍스트를 음성으로 옮기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이차적으로 양식화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말의 표현에는 구술성이 잠재되어 있다. 목소리로서의 말은 쓰기에 의해 처음부터 배척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기에 의해서 그 가치를 높였던 것이다. 

밀만 페리(Milman Parry)는 구술문화에 속하는 인식 세계 내지 사고의 세계 전체는 정형구적인 사고의 조립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예로 '호메로스의 문제'에 관한 그의 분석과 주장이다.

호메로스(Homeros, Homer(영)) 처음에는 실존을 인정했으나 18세기 이후 학계에서 실존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패리는 '원시적인' 호메로스의 시를 그 시 자체의 요소에 따라 분석했다. 패리는이를테면 호메로스의 시에는 어딘지 모르게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있다고 종종 느꼈던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타인의 시들을 짜집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했다. 호메로스의 시에 내재하고 있는 모든 특유한 특징들은 그 자체의 구술적 제작 방식에 의해 강요된 유기적 체계에 기인한다는 발견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일종의 관용구집을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호메로스는 거듭거듭 판에 박힌 문구를 사용했다. 즉, 그는 미리 만들어져 있는 방식을 이어붙였던 것이다. 구술문화에서는 일단 획득된 지식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되었다. 지혜를 적용시키기 위해서도 그리고 또 효과적으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고정되고 형식화된 사고패턴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플라톤때 변화가 일어났다. 기억을 도와주는 정형구 속이 아니라 씌어진 텍스트 속에 지식을 저장하는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쓰기가 지식을 처리하는 수단으로서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질문에 무책임하고 기억력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쓰기를 유보할 것을 심각하게 표명한 바 있다. [각주:6]

사람들은 쓰기 시작한 이후로 기억하는 법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대학교 교양 수업 교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학생들 중에 열명 정도의 친구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느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두명 정도만이 손을 들었다. 나는 친구들 전화번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족들이나 내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한다. 텍스트로 전부 남겨 놓았기 때문에 굳이 기억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사용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지식을 찾아야 하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현대에 들어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다시 구술성이 강화되고 있다. 쓰기를 아는 사람들의 구술성인 제 2 구술성이란 바로 이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매체 속의 구술성은 이전의 전통적인 구술성과는 달리 말과 문자가 뒤섞이거나 융합되는 현상이 드러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각주:7]

대부분의 사람들은 텍스트 보다 미디어에 더 열광한다. 말에는 단지 언어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비 언어적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다. 몸짓이나 억양 말투등이 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 사람의 감정과 의도를 표현하는 일인 만큼 우리는 말을 할때 의도와 감정을 최대한 전하기 위해 비언어적인 표현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문자언어에서는 감정의 표현이 구술 언어보다 제한되어 있다. 문자는 일단 한번 세겨지면 그 후로 변하지 않지만 말은 화자나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말은 다시 바꿔보면 구술 언어는 화자나 시대에 따라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의 대상은 가까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여서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구술 사회는 작고 결속력이 깊다. 그들은 추상적어거나 어떤 것을 정의 하는 것, 그리고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에 취약하며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 여기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집단에 대한 평가로 조정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인 사유도 낯설게 느낀다.

이것은 다시 다시 현대 한국 사회로 비추어 보았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 무리를 짓고 행동하는 것으로 치환될 수 있다."서구의 인터넷 사용이 정보적이라면 우리 나라의 인터넷 이용은 친교적이다. 논쟁 또한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다. 소통에서 친교성이 중시되고, 논쟁에 감정이 실리는 것은 구술문화의 특징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90%. 그때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구술문화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서구에서 몇백 년이 걸린 과정을 우리는 몇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구술문화의 특성을 완전히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우리 의식에 아직 구술적 특성이 강하게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각주:8]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성도 중요하지만 감성이 더욱 더 중요시 되는 사회에서 이러한 구술적 특성들은 앞으로의 인류 발전에도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1. 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entry.nhn?cid=272&docId=1529632&mobile&categoryId=272 [본문으로]
  2. Orality from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Orality [본문으로]
  3. 윌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머리말, 1,2장 http://blog.naver.com/iocean74?Redirect=Log&logNo=30010460694 [본문으로]
  4. 티 스토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블로그[무문자 사회와 문자사회] http://nomadist.tistory.com/165 [본문으로]
  5. 네이버 지식백과 월터 옹 : 구술성―문자성 연구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621&docId=1691628&mobile&categoryId=3884 [본문으로]
  6. 윌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머리말, 1,2장 http://blog.naver.com/iocean74?Redirect=Log&logNo=30010460694 [본문으로]
  7. 티 스토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블로그[무문자 사회와 문자사회] http://nomadist.tistory.com/165 [본문으로]
  8.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본문으로]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계절과 신화(神話, mythology)  (0) 2013.03.08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10. 08:33 My Work

1. You admire a character for trying more than for their successes.

2. You gotta keep in mind what’s interesting to you as an audience, not what’s fun to do as a writer. They can be very different.

3. Trying for theme is important, but you won’t see what the story is actually about til you’re at the end of it. Now rewrite.

4. Once upon a time there was ___. Every day, ___. One day ___. Because of that, ___. Because of that, ___. Until finally ___.

5. Simplify. Focus. Combine characters. Hop over detours. You’ll feel like you’re losing valuable stuff but it sets you free.

6. What is your character good at, comfortable with? Throw the polar opposite at them. Challenge them. How do they deal?

7. Come up with your ending before you figure out your middle. Seriously. Endings are hard, get yours working up front.

8. Finish your story, let go even if it’s not perfect. In an ideal world you have both, but move on. Do better next time.

9. When you’re stuck, make a list of what WOULDN’T happen next. Lots of times the material to get you unstuck will show up.

10. Pull apart the stories you like. What you like in them is a part of you; you’ve got to recognize it before you can use it.

11. Putting it on paper lets you start fixing it. If it stays in your head, a perfect idea, you’ll never share it with anyone.

12. Discount the 1st thing that comes to mind. And the 2nd, 3rd, 4th, 5th – get the obvious out of the way. Surprise yourself.

13. Give your characters opinions. Passive/malleable might seem likable to you as you write, but it’s poison to the audience.

14. Why must you tell THIS story? What’s the belief burning within you that your story feeds off of? That’s the heart of it.

15. If you were your character, in this situation, how would you feel? Honesty lends credibility to unbelievable situations.

16. What are the stakes? Give us reason to root for the character. What happens if they don’t succeed? Stack the odds against.

17. No work is ever wasted. If it’s not working, let go and move on – it’ll come back around to be useful later.

18. You have to know yourself: the difference between doing your best & fussing. Story is testing, not refining.

19. Coincidences to get characters into trouble are great; coincidences to get them out of it are cheating.

20. Exercise: take the building blocks of a movie you dislike. How d’you rearrange them into what you DO like?

21. You gotta identify with your situation/characters, can’t just write ‘cool’. What would make YOU act that way?

22. What’s the essence of your story? Most economical telling of it? If you know that, you can build out from there.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8. 17:09 Project/History

여러 지방의 신화를 묘사하는 그림들. 11시 방향부터 시계 방향으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중국 신화의 여와, 북유럽 신화의 로키, 크툴후 신화의 네크로노미콘, 인도 신화의 크리슈나, 일본 신화의 아마테라스, 이집트 신화의 호루스, 히타이트 신화의 테슙, 켈트 신화의 마하.

  선사 시대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예언자, 샤먼, 원시 종교 지도자 등에 의해서 구전의 형태로 전승되었다. 이는 현대 과학처럼 실험이나 계산에 의해 얻어진 논리적인 지식이 아닌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얻은 경험들에 의해서 그 의미와 가치가 채색된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한 모든 자연현상들을 신화를 통한 구전 문화 전통 속에서 계승 발전시켰고, 이 신화에서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신화의 기능이라는 것은 인간 행동에 있어서의 의미와 규제를 가리키는 것이며 신화가 곧 종교였던 시기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계절과 날씨의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농사의 시작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잉여 생산물은 관리자라고 하는 주요인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문명이 시작되고, 문명은 계급을 점점 더 세분화 시켰으며 잉여 농산물을 관리하는 주요인물의 권위가 점차 강해짐에 따라 곡식창고는 신전이 되었고 관리자는 사제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농산물의 생산에 있어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계절과 기후를 신격화 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더욱 더 확고하게 다지게 된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잦은 범람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길가메시 서사시. 현실의 삶을 살기에도 벅차 사후 세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애환이 묻어난다.


지역 마다 신화는 각 지역의 계절 변화의 차이와 계절 변화에 따른 생업과의 연관성에 따라 전반적인 세계관이라던가 각 신화 속 신들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기후가 온화하고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여 농사를 짓기 좋은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동아시아 쪽의 신화의 신들은 친숙하게 묘사되며 세계관 또한 낙관적이다. 그런 반면 기후나 자연적으로 혜택보다 재앙이 더 많은 지역의 신화는 지극히 현세적이며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메소포타미아나 북유럽의 신화들이 그런 성격을 갖고 있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그리스 신화에 호라이라고 하는 계절을 담당하는 세 여신이 있는데 그녀들에 관한 일화는 딱히 없는 듯 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스 신화에서는 계절이 생긴 이유를 명계의 왕인 하데스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데메테르가 딸을 납치된 딸을 찾아 헤매는 사이 대지의 온갖 식물들이 말라 죽자 보다 못한 제우스가 중재를 하여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에게 돌려주지만 하데스로부터 받은 석류 세 알을 먹어버린 그녀는 일년 중 3개월은 명계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일년 중 페르세포네가 명계에 가 있는 3개월은 슬픔에 빠진 데메테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겨울이 찾아오고, 3개월 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찾아옴과 동시에 봄이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페르세포네는 죽음을 관장하는 명계의 여왕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씨앗을 뜻하기도 한다.


베르툼누스 신화는 계절과는 영 상관없는 모포나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베르툼누스는 변신의 귀재였지만 모포나의 앞에서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였다고....그리스 로마 신화 통틀어 공식 미남인 아폴론을 이긴 외모의 소유자.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로마 신화에서의 계절의 변화는 베르툼누스라는 신이 관장하고 있다. 그리스나 로마와 같은 지중해 지역은 계절의 변화가 적기 때문에 계절의 신의 역할 또한 그리 크지 않다. 베르툼누스는 로마 신화에만 등장하는 신으로 변화한다는 뜻인 베르테레(vertere)’ 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사신(四神)이 각각 네 개의 방위와 사계절을 관장하고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동쪽에는 청룡이, 남쪽에는 주작, 서쪽은 백호, 그리고 북쪽은 현무가 수호하고 있으며 이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의미한다. 방향은 단순히 지역적인 개념이 아니고 각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계절이 연관되어 있어 동풍과 관련한 계절은 봄이 되고, 서풍과 관련한 계절은 가을이 되며, 남풍과 관련한 계절은 여름이, 북풍과 관련한 계절은 겨울이 되기 때문이다


동방의 신 복희, 중국 고대 창조신화의 창조신인 여와와 남매로 구전된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동이족의 위대한 우두머리라고. 신화와 역사는 구분되어져야만 한다.


이와 비슷하게 중국 신화에서는 방위를 맡는 신들과 계절의 신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동방의 신 복희(伏羲) 서방의 신 소호(少昊) 남방의 신 신농(神農) 북방의 신 전욱(顓頊)이 그들이다. 이 네 대신(大神)들에게는 각기 한 명의 보좌신이 있는데 이들 보좌신이 사실상 각 계절을 담당하게 된다. 즉 봄의 신은 구망(句芒) 여름의 신은 축융(祝融) 가을의 신은 욕수(辱收) 겨울의 신은 현명(玄冥)이다. 특이한 점은 거의 모든 신화에서 죽음과 겨울을 연관시키는 반면 중국 신화에서는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죽음과 상관된다고 생각하여 가을의 신인 욕수에게 징계와 형벌의 기능도 부과했다는 점이다.

 세계가 넓은 만큼 신화의 세계도 다양하고 넓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신화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설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신화는 어느정도 선사시대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게끔 하지만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늘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Project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  (0) 2013.04.17
창세기 1장~12장 요약과 생각  (0) 2013.03.29
아트라하시스  (0) 2013.03.29
문명의 역사 - 그 서론과 역사의 가치  (0) 2013.03.20
Orality (구술성)  (2) 2013.03.15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7. 23:51 My Work/sketch

아침의 카페테리아는 점심 때 보다 사람이 적어 매우 한산하고 거의 모든 자리가 비어 있지만 오히려 점심 보다 더 활동적인 느낌이 든다. 일하는 사람들은 점심 메뉴를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고 학생들은 조금은 늦은감이 없잖아 있는 아침을 먹는다. 그들은 모두 하루를 시작한지 채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잠이 조금 덜 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입안에는 아침을 먹은 후 양치를 한 까닭에 아직 청량감이 남아있다. 

카페테리아의 중앙에는 기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감이 없잖아 있는 벽이 있다. 그 벽을 등지고 한 여자가 앉아있다. 그녀는 거의 매일 그 자리에 있다. 내가 학교에 오는 아침부터 점심을 먹을 때 까지도 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은 그녀의 지정석인 것 같다. 그녀는 언제나 노트북을 앞에 두고 노려보거나 타이핑을 하거나 한다. 아마도 작가가 아닐까, 내 생각은 그렇다. 어제 점심에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을 해 보았다. 길고 덥수룩한 검은 머리에 나이는 40대 초중반정도로 보이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그녀는 의외로 달콤한 러브스토리를 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이 막히자 나는 옆에 있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입안에 민트향이 남아 끔찍한 맛이 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나쁘지 않다. 

posted by 라미크로X
2013. 3. 7. 15:44 My Work/diary

 같은 반에 페루인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애가 좀 모자르다. 그냥 무지한거면 이해를 하겠지만 태도도 불량하고 종종 문란하다 여겨질 때도 있을 정도로 행실이 좋지 못하다. 차마 구체적인 묘사까지는 하고 싶지도 않아 넘긴다. 사실 뭐 어떤 짓을 한들 나한테만 잘 하면 그만이거든. 그치만 결정적으로 이 친구는 나를 싫어한다. 다행인 것은 나도 이 친구를 싫어한다. 그래서 조별 과제를 하게 될 때 이 친구랑 짝이 되면 그냥 손을 놓고 있기 일수다. 처음에는 나도 몇번 좀 같이 해 보겠다고 애를 써 봤는데 도무지 말을 들어먹기를 하나 적극적이기를 하나, 모르면 배우기라도 해야 하는데 배우고자 하는 의지 또한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공교롭게 짝이 되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치만 결국 내가 의욕이 없는건 내 잘못이다. 괜히 남의 탓 하고 싶어서 미워하는거지, 요즘 헤이 해 지고 멍청해진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다. 아, 현실을 인정하는건 참으로 아픈 일이로구만. 뼈빠지게 고생하는 엄마 아빠 생각도 해 보고 내가 돈벌면서 힘들었던것을 되세김질 해 봐도 나는 범인인지라 그냥 편하고만 싶다. 지칠 만큼 공부한 것도 아니고 주위에 인간 관계가 복잡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마음이 계속 무거운 걸까.

뭔가 내가 계속 잘못을 하고 있나보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불편하게 만든다거나 하고 있나보다. 못난 주제에 잘난척이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나보다. 내 존재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걸까. 남 뒷담화나 하고 앉아있고 조금 못났다고 약점 잡아서 그걸로 반찬삼아 신나게 이야기나 하고 아이고, 이렇게 보니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다. 내가 제일 못났다.

어릴 때 나는 발달이 늘 느렸다. 그래서 유치원도 다른 애들 보다 일년 늦게 들어갔는데도 7살이나 되어서야 적응을 했다. 그 전에는 선생님이 화장실만 가도 울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사회성은 물론이거니와 학습발달이 늦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적에 많이 아팠어서 그 것 때문에 그런 걸로 생각을 했다. 소아비만에 발달장애까지 정말 대책이 없는 아이였던 것 같다. 만약 내 아이가 그랬다면은 나는 그 애에게 정도 못 주고 포기해버렸을 것 같지만 우리 엄마는 참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 부터 엄마랑 동생이 제일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와는 사실 어릴적에는 별 다른 교감을 하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도 그 때는 젊었기 때문에 덜 떨어지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부모님 두분 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셔서 틈만 나면 어디든 나갔다. 집에 자가용이 없던 시절에도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나랑 동생 손을 붙잡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계절에 상관없이 산이든 계곡이든 바다든 질리도록 여행을 다녔다. 지금에와서 생각하지만 그 여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거나 하지 않았다고 그리 생각한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교감이 있었기에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집단 따돌림도 당해보고 선생님들에게 이유없는 구타도 많이 당해왔지만 철이 들 무렵 부터 그런 것들을 서서히 극복하고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종종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불안해지고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질때마다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나는 벌써 한국 나이로 스물 여섯살이나 먹었고 내가 속한 사회는 어른들의 사회인데 내 걸음걸이는 여전히 느려서 청소년기 그 어딘가 쯤에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뒤늦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다. 내 또래 애들은 저 멀리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초등학교 6년 내내 한 발자국도 내딯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뛰었다. 엄마한테 처음으로 학원이라는 곳에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종로 m 스쿨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학원이었는데 등록하러 갔더니 레벨 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레벨테스트를 마치자 학원에서는 나를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성적이 너무 낮아서 그 어느 레벨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기가 차했지만 그 보다도 내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했다. 그렇게 그 학원에서 퇴짜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이곳 저곳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작은 학원이 있다는 것을 안 엄마는 나보고 그 곳이라도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만약 싫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물론 가겠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도 역시나 레벨테스트는 쳐야만 했다. 매우 낮은 점수가 나왔는지 열등반에 배정되기는 했지만 내쳐지지 않음에 감사했다. 그 날부터 달렸다. 그 곳 선생님들은 정말 지금 생각 해 보면 굉장한 직업적 소명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기초도 채 다져져 있지 않은 나를 따로 학원 수업 시작 전부터 불러서 개념을 이해시키고 학원 수업이 끝난 후 이해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굳이 페이를 더 받는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분들은 나에게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그분들 덕분에 학습 발달은 어떻게든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는 학원은 어디에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애들의 괴롭힘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일부러 여학교로 진학을 했다. 여자애들 끼리만 있으면 외모에 대한 패널티는 조금 덜 하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은 수월했다. 그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학원에 가서 열두시 넘어서 집에 오는 고단한 생활 보다도 그놈의 인간관계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은 내가 어디 있던간에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죽을 때 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생각한게 홀로 있음에 익숙해지기이다.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저지르기. 호스트 가족들과 그다지 맞지 않음에도 계속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이다. 눈보라가 치던 비바람이 불던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내 스스로 집에까지 올 수 있다는 것 만큼 나에게 크나큰 이점은 없다. 가끔 나는 내 상황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뚱뚱하고 못생기고 냄새나고 더럽고 멍청하고 그런데도 지금 내 주변은 전부 어른이라 마지못해 참아주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나와 짝꿍이 하기 싫었던 아이들의 마음이나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으아... 스탑 씽킹... 사람이 미치는 게 한순간이라는 것이 확 느껴지는 일기... 내 자신과 한 다짐을 왜 자꾸 까먹냐.. 내일 당장 내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비참해져도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지. 엄마는 내가 뚱뚱하고 못생기고 냄새나도 더럽고 멍청해도 나를 계속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테니까.....

'My Work >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03-05  (0) 2013.03.06
2013-03-04  (0) 2013.03.05
posted by 라미크로X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