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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2013. 5. 4. 17:40 Project/History

요한복음의 1장부터 12장의 주요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함께 그의 고난에 관한 것이다. 요한 복음의 처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여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보충하며 하나님과 말씀을 구분함과 동시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서술되어있다.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로 말씀이 곧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말씀(로고스), 그리고 예수님은 구분됨과 동시에 동일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부터는 예수님의 기적의 행하심과 박해가 나온다. 널리 알려져 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병자를 치료하고 장님의 눈을 띄워 주며 안식일에 일을 행한다는 이유로 박해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또한 태초 이후 쉼 없이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도 일한다 말씀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뭔가 대단한 장소에서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범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포도주가 넘쳐나는 부잣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겠는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을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은 어린아이는 집이 넉넉하여 그 것을 선뜻 내놓았겠는가? 기적이란 실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희생과 사랑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빛은 태양빛이 사물을 보게 하듯 사람 안에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랑을 보이게 했다. 남의 집 경사를 위해 물을 선뜻 포도주와 교환해 준 사람들, 아이가 들고 있는 광주리 속에 들어있는 빵과 물고기를 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주섬주섬 내어 놓은 사람들, 쉬는 날에도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들이 기적이다.

예수님은 계속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나 되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한다. 일제시대와 그 이후 군사독재 때, 민중과 열사들을 탄압한 자들은 일제나 군부임에 틀림 없으나 실질적으로 탄압을 행한 것은 그러한 악을 선으로 믿는 또 다른 민중이며 자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이며 열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에도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불태운 자들 또한 이상주의 사회국가 건설의 미명 아래에 있었던 모택동과 홍위병들이었다. 예수님의 박해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갖고 있다 한들 폭력과 힘 또한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악에 가깝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역사 속에서 선이 힘 또한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선함은 힘이나 폭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힘을 가진 소수의 악들이 힘 없는 다수의 선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젠가 올 선의 승리이며 선을 승리하게 할 것이다.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에서 마치 슬로건처럼 내세우는 말 같지 않은 말이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다. 단순하게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실로 의로운 사람이라면 저 말만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0-38”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는 믿지 않더라도 그 일만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다. 희생과 사랑의 일들이다. 그것이 참됨을 알면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지위를 잃기가 두려워 죄책감을 느끼면서 까지 하나님을 박해한다. 사람은 진리를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특히나 돈과 명예가 있을수록 갖고 있는 것을 잃기 싫은 마음과 더욱 더 갖고 싶은 욕심에 신념을 따르는 것이 어렵다. 일제 치하나 군부 때도 대다수의 갖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악임을 알면서도 따르고 민중과 선을 억압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말 보다 실로 어려운 일이다.

현세의 생명과 죽음 후 영생에 대해 12장에서 이렇게 나온다. 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유 또한 희생을 위해서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진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자들은 매우 드물며 그러한 자들은 사후에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하고 열사들이 그러하며 순직자들이 그러하다.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선을 따르는 자들은 목숨의 그렇지 않은 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고문과 살육에 맞서 선하게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선으로서 선을 행하다 죽은 자는 죽지 않음과 다름없다. 선은 그가 죽은 후에도 다른 자로 하여금 계속 이어지며 칭송되고 기억될 것이다.

 말로서 기도하고 말로서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곧 진리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진리는 싸움을 만들 수도 없고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상처주거나 억누르는 것 보다 아이러니 한 일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셨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치라 하시며 예수께서는 여자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왜 사람들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일까?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녀는 어겼으므로 그녀는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간음이란 실로 행위를 한 것 이외에 음욕을 품은 것 만으로도 간음이 되며 또 다른 큰 죄 중 하나인 살인도 살인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타인을 미워하는 것 까지도 살인이 된다 성경은 그리 가르치고 있다. 그리 따진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 되나 이 간음한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는 뉘우치고 회개 또한 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며 앞으로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며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현재 예수님을 알고 있다 믿고 있다 자신 있게 떠들고 다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생면부지인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하거나 이도교들과 무신론자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자들이 아닌가? 이 들 또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례를 받았다고, 매주 교회를 다닌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원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란 실로 좁은 문이다. 실로 왕중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는 언제나 낮은 곳에서 대단치 않은 사람들, 곧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리도 자신을 낮추고 계신데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다는 자들이 어찌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기독교의 회개하라는 말에 이렇게도 무게가 있는지 몰랐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죄를 알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누구도 타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고 모든 욕구를 버리며 살아갈 수 없다. 그저 계속 주님 앞에 육신이 죽는 날 까지 뉘우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힘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육신의 목숨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 보다 진실로 참된 가치, 참 빛, 하나님을 으뜸으로 두고 섬기는 것이 인간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며 기독교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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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미크로X
2013. 4. 17. 09:53 Project/History

  플라톤은 그가 말하는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커다란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 곳에서 그들의 발과 목에 사슬을 묶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가정하였다. 그들은 머리를 돌릴 수 조차 없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전방에 존재하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으로부터 돌연히 솟아오른 높은 지대가 있다. 이 높은 지대에는 물건들을 나르면서 앞뒤로 걷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르는 물건들은 나무와 돌과 그 밖의 다양한 물질들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간의 상(像)들이었다. 이 걷고 있는 사람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단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을 뿐, 서로를 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 뒤에 있는 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있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이며, 그 그림자는 사람들이 불 앞으로 걸을 때 비친 반영이었다. 그들은 대상물이나 그것을 나르는 사람을 결코 볼 수 없으며, 그 그림자들이 다른 사물들의 그림자인지 어떤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한 그림자를 보며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벽에 반사된 메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밖에 다른 것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수들은 벽에 만들어진 그림자들만을 인식하게 될 뿐이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이 죄수들 중 한 사람이 그의 족쇄를 풀고 일어나 주위를 돌아 불빛을 향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처음에 그의 모든 운동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벽을 통해 그림자를 보는데 익숙했던 그 움직이는 대상들을 직접 보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혹시 이 움직이는 대상물들이 그림자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는 그 대상이 그의 눈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그가 불 자체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보게 된다면, 그의 눈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 때 틀림없이 그는 그를 풀어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그가 아무런 모순 없이 경험할 수 있었던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 그림자들이 그가 불빛 속에서 보았던 실존하는 대상물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 죄수가 되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동굴 입구로 통하는 가파르고 험준한 통로를 통해 강제적으로 끌려와 태양빛을 접하게 된 후를 생각해보자. 태양 광선은 눈에 매우 고통스러운 충격을 주게 되고, 그는 그가 방금 실재적이라고 믿었던 어떠한 사물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이 동굴 외부의 세계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 그는 몇몇 그림자들을 인지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친밀감을 가질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면, 그는 이전에 그것이 동굴의 벽에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양을 보게 될 것이며, 수면에 비친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들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지식에 있어 중요한 전환, 또는 진보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때 순전히 어둡고 흐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이제 좀더 세밀한 선과 색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상한 체험을 통해 그 풀려난 죄수는 점차적으로 사물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태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계절들과 사물의 온갖 변화를 이끄는 것이 태양이며, 그 밖의 많은 사물이 그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동굴의 벽에서 보았던 것, 즉 그림자 반영들과 가시계(可視界)에 실재하는 사물들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태양 없이는 가시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죄수는 동굴 속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될 것인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지혜(知慧)라고 믿었던 것을, 즉 지나가는 그림자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을 칭송하며, 그림자들이 진행되는 질서를 가장 훌륭하게 기억함으로써 다음에 올 그림자를 가장 잘 추측했던 사람에게 상을 주어 모두에게 존경하도록 하였던 행동 방식을 회상하면서, 동굴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였던 인물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환경에서 벽면에 반영된 그림자들을 분별하는 데 다른 죄수들과 경쟁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대상들에 관해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그 설명을 죄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죄수들은 그 상황을 매우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비웃을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의 시력은 완벽했으나, 이제 그는 시력을 상한 채 돌아왔다고,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플라톤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각주:1]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세 가지의 비유를 들었다.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그리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데아란 절대적인 것,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눈이 아닌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정사각형을 떠올렸을 때, 우리는 개념적으로 완벽한 정사각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로 정사각형을 그리는 경우 어떤 완벽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개념에 가까운 정사각형은 그릴 수 있지만 완벽한 정사각형은 그릴 수 없다. 우리 생각 속에 있던 정사각형은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에 비유할 수 있다. 

플라톤의 세가지 비유 중 태양의 비유는 이데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행동들을 뜻한다. 진실, 사랑, 평화, 정의, 믿음과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개념들을 일깨워 주는 행위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 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물체를 볼 때에도 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를 태양의 비유라고 한다.

선분의 비유는 보이지 않는 것이 순수한 이데아에 가깝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돈과 사랑이 있을 때, 돈은 가시적이므로 가짜에 가깝고 사랑은 보이지 않으므로 순수한 이데아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번 포스팅의 주제와 함께 첨부한 동영상의 내용이 바로 동굴의 비유이다. 

처음 동굴 밖으로 끌려 나온 죄수는 태양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결국 이상은 동굴 밖에 나간 채로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는 것이며 단지 이상에 가까워지고 본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비유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부분은 실제 인간사회에 적용을 시켰을 때 어디가 동굴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만큼 동굴의 비유를 적용시키면 교육의 역할은 동굴 밖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교육이 그림자 놀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데아론 적으로 따진다면 이 비유 자체도 완벽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사실 여러모로 알고 있었던 것들과 알아 갈 것들에 대해 회의와 의문이 던져지는 이론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가 더 진리에 가깝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은 그림자를 보고 있지 않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반문들이 진리를 맛 본 죄수가 동굴 속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동굴 속 그림자놀이밖에 모르는 다른 죄수들에게 동굴 밖의 이야기를 했을 때 일어나는 혼란인 것일까? 이 비유는 얼마든지 사용하는 사람 좋을 대로 사용되어 질 수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 해야 할 것이다.



  1. 플라톤의 인식론http://sang1475.com.ne.kr/philo/platon2.ht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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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9. 23:07 Project/History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아무 형태도 없던 지구에 빛이 생겨 빛과 어둠이 나뉘고 밤낮이 생겼다. 물과 물이 나뉘어 하늘이 생기고 하늘 아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서 땅과 바다가 생겼다. 땅에는 식물들이 자라게 되었다. 해와 달을 만들어 낮과 밤을 그리고 계절들이 생겼다. 밤 하늘에는 별들도 만드셨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하늘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땅 위에 짐승들도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다른 생물들을 지배하게 하셨다. 그리 만든 사람은 선악과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며 다른 것은 다 취하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도록 하셨다. 최초의 인간은 아담이었으며 그는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짝을 만들기 위해 그의 갈빗대를 취하야 여자를 만드셨다. 어느 날 교활한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라 유혹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함께 나누어 먹으니 수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여자에게는 산고의 고통을 남자에게는 농사의 수고로움을 지게 하셨다. 땅으로 내려온 그들은 아들을 낳았는데 형의 이름은 카인으로 농사를 짓는 자였고, 동생의 이름은 아벨로 양을 치는 자였다. 첫 번째 추수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재물은 받으셨으나 카인의 재물은 받지 않아 질투심의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아벨의 피로 카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며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는 표를 받았다. 그 후로 카인은 대를 이어 갔는데 카인의 자손 중에 야발은 천막에 살면서 가축을 기르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동생 유발은 최초의 음악가였으며 두발-카인이라는 자는 철과 구리로 각종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아담의 아내도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때 아담의 나이는 130살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셋이라 지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 하였다. 인류가 번성하고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의 죄악 또한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지상에 창조한 것들을 홍수로서 쓸어버리시겠다 하시었으나 아담의 자손 중 하나인 노아는 의인이라 여호와의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잣나무로 배를 만들어 그 곳에 노아의 식구들과 모든 생물 한 쌍씩 넣어 살아남도록 하였다. 비는 40일 동안 내려 150일동안 물이 땅을 뒤엎었다. 땅이 마르고 여호와께서는 노아가 바치는 제물을 받으시며 다시는 사람을 물로서 멸하지 않겠다 하시며 그 증표로 무지개를 삼으셨다. 노아의 아들은 셈, 함 그리고 야벳이 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인데 노아가 함이 자신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가나안을 저주하여 가장 천한 종이 되라 하였다. 이들 아들들의 후손은 대대로 이어져 나가며 홍수 후 여러 나라와 민족으로 나누어졌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 중에는 아브람이 있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여 하란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촉복하시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였으며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이 들어 그는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다. 아브람의 식구들이 이집트로 가면서 아브람은 이집트인들이 사래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것을 염려해 오누이로 위장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아브람의 예상대로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지만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다. 하여 바로는 다시 사래를 아브람에게 돌려준 후 아브람의 식솔들을 나라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바벨탑(창세기 11장 1절~9절)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바빌로니아에 있는 한 평야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탑을 높이 쌓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말이 통하지 않게 하셨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살짝 맥락 밖에 있는 듯 하여 뒤로 빼 놓았지만, 원래는 아브람 이야기의 앞에 위치하고 있다. 구술성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전에는 왜 이렇게 같은 말이 반복되고 무엇보다 굳이 한 집안의 가계 전체를 읊는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글이 없었던 시대에는 기록이 불가능하므로 축약 해 버리거나 생략 해 버리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구전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굳이 전부 읊어야 했으며 이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지금의 성경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계를 읊는 것은 그 만큼 자손들이 번창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중간에 두발-카인이라는 자가 철과 구리로 기구를 만들었다는 부분과 바벨탑에서의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대신 역청을 썼다는 부분에서 문명의 발전이 어느 정도 까지 이루어졌는지 대략적인 추측도 가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해가 힘들었다. 카인의 재물은 왜 받지 아니하셨는가? 그 것 보다 더 의아한 내용은 홍수 이후 구절을 보면 살인을 하는 자는 죽이라 되어 있는 데 카인은 동생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카인을 죽이는 자는 7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다. 카인의 자손 중 라멕이란 자 또한 한 젊은이를 죽였는데 라멕을 죽인 자는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악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하나님 께서는 홍수라는 징벌로서 다스리시고 홍수 이후에 살인을 하지 말라는 규범을 만드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창세기를 보면 사람들의 수명이 상당히 길다. 거의 900년 가까이 되니 실제 수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법 하다. 생식 또한 100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자손을 낳았다고 하는데 나이를 세는 법이 현재와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진짜 옛 사람들의 수명이 실제로도 길었던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성경 인물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 원인이 자외선 등의 유해물질을 차단하던 궁창 위의 물이 홍수 때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말씀하신 바대로 된 것이다. (홍수 이전 인간의 악행을 보시고) 너희들 안에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니, 그것의 연한은 120년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인물들의 수명을 기재해보면, 노아의 홍수 이전 보통 800년 이상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후, 절반이하로 급격하게 줄고, 또한 서서히 더 줄다가, 모세가 120살에 죽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른다.”[각주:1]

결론적으로 성경은 구전에서 글로 옮겨진 것이며 상당히 오래된 문헌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본문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시대상과 구전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위키피디아[창세기] http://ko.wikipedia.org/wiki/%EC%B0%BD%EC%84%B8%EA%B8%B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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